좌표를 다시 찍어야 한다
사계절 어느 밤이든 그렇지만, 특히 습하고 무더운 여름밤이면 불을 잘 못 끄고 잠든다. 이 해로운 습관으로 수면 장애가 심해지고 있었다는 걸 자취 수년 차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누군가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같이 잠들 때는 신기할 만큼 괜찮다가도, 1인 가구로 살며 대부분 홀로 맞았던 밤마다 기어이 작은 불이라도 켜둬야 했다. 침대 머리맡과 책상 천장과 벽에 번갈아 조명을 놓았고, 자취방을 떠날 무렵 이삿짐 상자에는 조명만 여러 개 담기게 되었다.
스스로 불을 끌 의지가 없음을 받아들이고 내가 잠든 뒤 알아서 꺼지도록 맞출 수 있는 타이머 조명에 간절하게 기댔건만, 그 효과도 며칠뿐이었다. 햇빛이 약점인 흡혈귀와 정반대로 빛을 빨아먹어야 사는 운명이라도 타고난 건가? 차라리 그렇다면 좀 나으련만. 이 글을 쓰기도 좀 덜 부끄러우련만!
이토록 깜깜한 밤이 두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리,
밤이 깊어질수록 크게 울어 더 잘 들리게 되는 벌레의 소리다.
다만 뭐가 얼마나 우냐는 물음에 확신하지 못할, 내 상상의 소리. 작년까지 칠 년을 살았던 자취방에서 제철 하루살이 벌레들과 매 계절을 건넜지만, 때를 가리지 않는 바퀴 같은 벌레가 나타난 적은 단 서너 번이었다. 또 그조차 안 된다고 한동안 생활 방역이랍시고 집안에 음식물도 들이지 않고 근거 없는 벌레 퇴치 제품을 막 사들였으니, 치사해서라도 벌레가 떠날 환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전에 살던 기숙사에서 큰 벌레를 봤던 밤에는 하필 룸메이트도 없던 날이라 열람실로 도망쳤고, 그다음 고시원에서 지내던 학기 중에 갑자기 자취방을 구한 까닭도 건물에서 연달아 바퀴를 봤기 때문이다. 벌레가 눈앞에 가만히 있어도 잡지도 쫓지도 못하고 패닉에 휩싸이는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자취방의 조건도 단 하나. 나 살기 좋은 방보다 벌레가 살지 못할 방이 되도록, 벌레 있던 역사가 길지 않을 신축 건물을 찾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벌레로 인해 집 버리고 달아나는 짓은 못 하게 되었다. 대신 평소에 부탁을 잘 못하면서도 지인들에게 제발 벌레 좀 잡으러 와달라고 사정하는 기술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벌레가 당장 있고 말고가 문제라기보다, 과거와 현재를 떠나 미래에도 평생 벌레와 공생하지 않겠다는 비현실적인 가능성에 쩔쩔매다니. 정작 중요하게 돌봐야 할 다른 일상들에는 무심하면서, 벌써 무려 이십 년도 넘도록 벌레와 혼자 씨름하는 모습이 한심하다. 더군다나 기후정의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실천하기로 다짐한 작년부터 이 빌어먹을 공포증이 너무 부끄러워 미치겠다.
결국 내 삶을 지키겠다고 벌레를 삶터에서 쫓아내려 한다니?
그러고도 이 집에서 내가 나의 살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을까?
계약서를 쓰고 월세와 보증금과 관리비를 낸다는 이유로 나만이 소유하는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이 된 조카들과의 나들이에서, 영유아들을 가르치는 일터에서, 벌레를 만난 아이들은 내게 해맑게 손짓하거나 덥석 잡아 가까이 내민다. 그럼 나는 어쩌다 아주 가끔 표정 관리에 성공하고, 대체로 투명하게 질색한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의아해하거나 재밌다는 듯 깔깔거린다.
겁쟁이!
그럼 당연히 창피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 사실이니까. 억지로라도 용감한 어른인 척하고 싶지만, 하얗게 질려서 아닌 척하면 더 웃기겠지. 게다가 꽤 자주 어른보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아이들에게는 들키기 십상이다. 순수하고 솔직하게 세상을 마주하는 아이들에게 벌레란 여기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동료 생물일 테니. 오히려 작고 귀여운 생명들로부터 뒷걸음질하는 나를 부자연스럽게 여길 것이다. 주변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나를 달랜다. 괜찮아! 벌레는 너를 해치지 않아! 벌레보다 네가 커! 겁먹을 쪽은 네가 아니라 벌레야! 그러니 벌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벌레가 끔찍하고 무서워서 싫다고 고백할 수 없다. 설령 오만하게 이기적으로 말할지라도 아이들은 또 묻지 않을까.
그런데 왜요? 왜 싫은데요?
끔찍하니 무섭고 싫다는 논리도 어딘가 허전하므로, 거기서 더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아니, 할 말이야 여전히 많다. 언제나처럼 지긋지긋한 레퍼토리를 읊을 수 있다. 이 모든 원인이 틀림없는 유년 시절 얘기를 들추기는 어렵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그조차도 변명 같아서 꺼려질 뿐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릴 적부터 벌레를 무서워한 나 때문에 아빠가 걱정이 많았어. 내게 벌레 실물을 꼭 닮은 모형 장난감 세트를 사주고 가지고 놀면서 천천히 친해지라 했지만, 나는 그걸 집안의 가장 높은 서랍장에 숨겨둘 뿐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밖에서 놀고 있을 때 아빠가 집 바닥에 모형을 가득 깔아뒀어. 공포증은 더한 공포로, 충격은 충격적인 충격 요법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교육법을 믿었던 탓이야. 그리고 잠시 뒤,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온 나는 벌레 무더기에 뒤덮인 집을 봤고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충격 요법은 역효과를 일으켰고, 그때부터 나는 자그마한 벌레만 보더라도 생난리를 치게 되었다.
‘벌레’의 ‘벌’만 들어도 머리가 차가워지고 온몸이 싸하게 식을 만큼 생각이 현실을 압도하는 공포증을 안고 살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악몽을 꿨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나를 잡아먹으려 서 있던 집채처럼 커다랗고 나를 평생 쫓아올 것만 같은 레이더망을 닮은 더듬이가 달린 슈퍼 벌레와 맞닥뜨리는 꿈이었다.
하룻밤 넘게 자취방을 비울 때마다 지긋지긋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내가 없는 동안 바닥을 점령한 벌레떼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숨어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 같아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이 무서웠다.
심지어 이렇게 쓰는 지금도 그 모든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 믿는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데서 살아갈 비인간 종이 상상을 초월할 테니.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게 걷잡을 수 없는 공상인 것도 안다. 그래서 벌레가 멸종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지난 마음이 창피하다. 지구 어느 편에서 매일 인구 절멸이 일어나고 있는데, 고작 공포증으로 혐오 발언을 변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작년에 자취방과 가까웠던 서울 지역에서 러브버그가 출몰하자, 그 생태계 변동을 일으킨 기후 위기를 논하기보다 살충 방역만을 서두르던 세계에서. 최근 빈대가 전염병처럼 창궐했다고 표현하며, 개체 수가 다시 늘어난 기후 변화의 사정보다 빈대 학살법이 뉴스가 되는 세계에서. 내 사적인 공포증이 공적인 생태계와 맞물려 연결되는 현실에서, 벌레를 이웃처럼 받아들일 선택지를 외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거의 평생을 종차별주의자로 살았으니, 혐오가 혐오인 줄도 모르고 뻔뻔한 피해자처럼 굴었던 시간만큼 더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한때 애정도 테스트처럼 유행했던 이 질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엄연히 살아가고 있는 존재를 농담거리 삼아 인간만 즐겁게 소비했던 우습잖은 우스갯소리. 나는 직접 질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내가 내게 종종 물었고 그때마다 단 한 번도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가장 되기 싫은 문학작품의 주인공을 질문받는다면,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충’으로 변했다는 ‘그레고르 잠자’라고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대답할 테니까.*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바퀴벌레가 되었다고?
조금도 구체적으로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머리로만 생각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여성이고 퀴어이며 유색인종이거나 장애 있는 조건이 삶을 좌우할 수 없듯, 바퀴벌레가 된 네게 내가 이러쿵저러쿵해도 된다는 명제부터 되물어야 하리라고. 갑충이 되어 외롭게 죽은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현대인의 소외’ 따위의 인간 중심적인 교훈을 착취하기보다, 하필 그가 벌레가 되어 죽게 된 설정을 되짚어야 한다고. 이 밖에도 얼마든지 그럴듯한 말들이야 늘려 쓸 수 있겠지만 그러기 싫고, 그럴 수도 없다. 이제껏 기나긴 벌레 혐오를 떠들다 별안간 윤리적인 척하려니, 이 얼마나 꼴사나운가.
그래봤자 다 거짓말이면서. 내가 정말 벌레와 마주 보고 그럴 수 있을까? 과연 마주할 수나 있어?
그러다 보니…… 벌레에 맞서는 문학에 호기롭게 도전하겠다던 순간부터 일찍이 실패를 예감했다. 물론 벌레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한 글을 썼다는 시도는 작지 않은 성과로 남겠지만, 맞서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그림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글 좀 잠깐 썼다고 어제까지 있었던 공포증이 오늘 사라진다면 그거야말로 무서운 일이지. 그럼 나는 진작 허풍쟁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처럼 내 글을 떠받들며 확신하다 못해 맹신하다가, 내 믿음에 내가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아 넘어갈 것이다.
이겨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고. 애초에 이기고 말고를 말하려 글을 출발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벌레를 이기는 게 무슨 소용임. 나는 이미 벌레를 혐오하고도 무사한 권력을 쥔 인간인데. 어제도 자다 깨서 모기를 잡았는데. 그렇다고 잠 못 이룬 내가 진 것도, 비장하게 킬러를 살포한 내가 이긴 것도 아닌데. 잠을 쫓은 모기가 이긴 것도, 킬러에 죽었는지 어쨌는지 알 길 없는 모기가 진 것도 아닌데.
그러니 굳이 이기기 위해 맞설 대상을 정하자면, 벌레 아닌 벌레 ‘공포증’을 자아내는 이 불투명한 세계여야 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지 않아 망상에 빠지는 세계. 뜻 모를 당신의 속을 함부로 단정하여 실망하고 단념하는 세계. 가벼운 불안이 무거운 우울로, 사소한 상심이 거대한 냉소와 무기력으로 번지는 세계.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는 문장을 흐리고 지워내는, 보이지 않을수록 스스로 부릅뜨고 봐야 할 세계. 기후위기의 주범에 벌레가 느낄 인간공포증보다, 인간이 자초한 벌레떼의 습격에 대해 인간의 공포증이 다시 앞서갈 세계.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 세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을 수 있는 세계. 잘 보이는 것에 잘 안 보이는 것들이 가려지는 세계. 자극적인 공포영화처럼 변해가는 세계. 공포를 주는 이미지만 남고 실체는 스러질 세계. 실체 아닌 관념이 또 다른 공포증들로 분열할 세계. 그리하여 너무 많이 볼수록 어쩐지 아무것도 못 본 것만 같아지는 세계.
수면 장애로 일상이 다 망가져서라도 자취방을 꼭 떠나야 했던 날에도, 칠 년간 상상했던 어떤 실체도 확인하지 못했다. 본가에서 지내는 지금도 여전히 밤중의 소리에 예민하다. 다만 그럴 때, 이제는 일부러 더 예민하게 묻는다. 벌레의 울음과 몸짓 말고 나를 정말 잡아먹은 소리. 그 두려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의 공포증이 서로 공격하고 갈등하며 배척하는 자체가 거대 공포증으로 증식해가는 이 삶에서,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너는 내가 러브버그가 되면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물었잖아. 내가 빈대가 되면 어쩔 거야?”
“나도 물었어. 내가 모기가 되면 날 죽이려고?”
“네가 먼저 대답해.”
“네가 먼저 대답해.”
질문들만 줄곧 이어지고 그 끝에 좀처럼 응답은 오지 않던, 내 깜깜하고 막막했던 혼잣말.
그 오랜 시간 도대체 누구에게 들리라고, 누구의 응답을 받고 싶은지도 알기 어려웠던 혼잣말들.
어쩌면 혼잣말이라서, 혼잣말이니까 아무도 들을 수 없었고 누구도 당연히 나를 구할 수 없었을 텐데. 실은 그날 밤 나도 당신을 당신의 혼잣말로부터 구하지 못했고, 하물며 우리는 서로의 존재도 몰랐을 거라면.
이만큼 아득하게 동떨어진 세계 가운데 다시, 좌표를 찍어야 한다.
그 주소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몹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헛소리 중 하나.
헛소리가 아닌데도 헛소리처럼 외로워지고 마는 어떤 세계.
그곳으로, 사랑하는 당신과 귀를 맞대고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