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연의 리디큘러스!
외로운 시간에 맞서는 문학

기억재개발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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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기

 
 
   이제부터 너랑 절교할래
   
   변기에 나를 앉혀두고
   반 친구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얼마나 그 말을 들었던지
   단짝이었던 예지까지
   그 말을 했을 때
   더는 그 단어를 세지 않았다
   
   종이 울리고
   반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화장실엔
   변기와 나만 남았다
   
   문을 열었다
   
   덜 잠근 수도꼭지가 최선을 다해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거울 속에 내가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와 가장 절교하고 싶은 건
   나였다

변기

정다연

2023
시, 26행에 155자. 외로움을 이기는 문학, 유년의 기억.

혼자



   “쉬는 시간에 화장실로 와.”
   
   무리를 주도하던 한 아이가 말했다. 나는 불안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도 끔찍했지만, 갑자기 불림을 받는 것도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쉬는 시간이 없어지면 좋을 텐데. 혼자서만 견디는 쉬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나는 화장실로 따라갔다. 먼저 도착해 있던 아이들이 빈칸을 가리켰다. 변기 위에 앉아. 누군가 명령하듯 말했고 나는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철컥, 문고리가 잠기고 어느새 화장실 안은 발 디딜 곳 없이 붐볐다. 네다섯 명쯤 되었나. 무리 중에서 누굴 새로 들이고 따돌릴지 결정할 수 있는 아이가 내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너와 절교하겠다고. 그 이후에는 왜 내가 싫은지, 평상시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거슬렸는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분명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모욕적이었다.
   그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너랑 절교할래. 나도. 나도. 나도. 파도타기를 하듯 앞의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폭언을 가만히 들었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고 아이들이 우르르 화장실 밖을 빠져나갔다. 나는 변기 위에 홀로 앉아있었다. 아이들을 따라 바로 교실로 들어가면 울어 버릴까봐. 손으로 허벅지를 꾹 누르며 참았다. 나의 우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저 사람들은 내가 우는 모습을 볼 자격이 없어. 마음을 다잡았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종이 울렸고 이제는 그만 일어나야 했다. 교실로 가야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반 아이들보다도 스스로가 너무나 미웠다. 한 마디도 맞받아치지 못한 내가 자꾸만 주눅이 들고 표적이 되는 내가 세상 누구보다 싫었다.
   그 기억 때문일까.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같은 패턴의 꿈을 꾸었다. 상대방은 항상 나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다. 내가 얼마나 별로인 인간인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화를 냈다. 나는 그 말을 듣다못해 해명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틀어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처럼 쇳소리만 났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에서도 상대방을 향해 날을 세우지도 싸우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다보면 언제나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던 어린 나에게로 향했다. 
   이건 써봐야 하는 거구나. 몇 달 전 또다시 비슷한 패턴의 꿈을 꿨을 때 생각했다. 이미 지나왔다고 여겨서 나조차도 사소하게 치부했던 상처를 더 늦기 전에 들여다봐야 하는 거구나, 알게 됐다. 그렇지만 행동으로 옮기긴 쉽지 않았다. 과거의 상자를 열 때마다 눅눅하고 불쾌한 무언가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그 시절로 돌아가서 싸울 수도 없는데, 그들은 이미 내 인생에서 사라졌고 기억도 하지 못할 텐데. 왜 이걸 써야 하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깨달았다.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그 상처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그러자 내가 겪었던 일들이 극복과 싸움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몫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이해해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어린 내게 바보 같았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었음을 알아줘야 했다. 반 아이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울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는 걸 헤아려야 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이해를 구해야 했다. 이 시를 비롯한 내가 올해 완성한 한 권의 시집은 그 시절에 대한 뒤늦은 답신이다.
   혼자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시절 나를 가장 두렵게 하고 외롭게 했던 단어를. 과거에도 지금도 혼자라는 단어는 역시나 참 무섭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혼자, 혼자, 혼자. 말하다 보면 혼자가 자꾸 늘어 혼자가 아닌 게 된다는 걸. 너무 외롭고 무서웠어. 말하면 나도. 나도. 나도. 말해줄 누군가가 있다는걸. 당장 여기에 없더라도 먼 미래에는 반드시. 

혼자

정다연

2023
산문, 9문단에 1,481자. 혼자, 혼자, 혼자. 나도, 나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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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현대문학, 2019)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창비, 2021) 청소년 시집 『햇볕에 말리면 가벼워진다』(창비교육, 2024)가 있으며,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아롱이에 대한 글과 그림을 엮어 『마지막 산책이라니』(마저, 2022)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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