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온윤의 리디큘러스!
무대 공포증에 맞서는 문학

기억재개발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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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박물학

 
 
   조용해서 눈에 띄는
   백자가 되고 싶었어요

   꽃무늬가 없어도
   형형색색이 없어도
   그대로 사랑받고 싶었죠

   보잘것없어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마음
   나는 그 마음을 잘 압니다

   바로 지금, 침묵을 품에 안은 한 사람이
   갖가지 박물이 잠들어 있는 이곳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눈으로만 감상해주세요,
   라고 적힌 팻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말을 거는 대신 손을 거두어 가죠
   유리막 위에 지문조차 남기지 않게요

   쉽게 깨어지는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쉽게 깨어지지 않는 투명한 유리로
   그 주위를 감싸듯

   자그만 소란에도 쉽게 깨어지는
   평온을 위해서는
   단단한 침묵이 필요할 테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쩐지 눈이 가게 됩니다

   무얼 가만히 보고 있어요?
   한 무리의 일행이 다가와 물을 때

   고요한 박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보고 있다고,
   하마터면 대답을 떨어뜨릴 뻔합니다

   침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침묵을 깨뜨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침묵의 박물학

조온윤

2023
시, 30행에 354자. 침묵을 말하려면 침묵을 깨야 해요.

주문의 비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무대는 일곱 살 무렵 다니던 교회에서 성탄절을 맞아 올린 연극입니다. 청년부 형 누나 들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을 동원해 꾸민 아기자기한 공연이었고, 내가 맡았던 역할은 고양이를 연기하는 단역이었죠. 자세한 줄거리까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고양이 귀 모양의 머리띠를 쓰고 교회 예배당 연단에 서서 어두운 객석에 앉아 있던 어른들을 마주 보았던 것만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어린 내가 어이쿠! 하는 대사와 함께 넘어지는 척 연기를 하자 어른들이 웃음을 터뜨렸던 것도요. 고양이뿐 아니라 여러 동물이 등장했던 기억을 미루어볼 때 동물 우화를 극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아주 종교적으로 노아의 방주에 오르는 동물 이야기를 각색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작 일고여덟 살 정도 되는 배우들이 그런 이야기나 연극의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연기했을 리는 없겠지만요.
   스무 해도 넘은 성탄절의 그 무대를 지금까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건 처음으로 관객들 앞에서 느꼈던 감정들 때문입니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어설픈 연기에 객석의 어른들이 전부 웃음이 터졌던 그때, 어린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다름 아닌 수치심과 두려움이었거든요. 많은 사람이 나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나에게 그닥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른들의 그 웃음은 당연히 자식뻘 되는 아이가 무대에서 부리는 재롱이 기특하고 귀엽다는 반응이었던 게 분명하지만,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의 나는 그런 의미까지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내가 어른들이 보내오는 반응과 관심을 즐기는 성격이었다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많은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소심하고 유약한 아이일 따름이었죠.
   그 후로도 나는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에는 좀체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무리 궁금한 게 있어도 내 의지로 손을 들어 질문해본 적이 없었고, 조장이라든가 모임의 주최자처럼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은 가능한 한 면피하려고만 했어요. 첫 무대에서의 두려움이 도화선이 되었던 건 아닙니다. 그때의 기억은 스스로 양지보다는 음지에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게 되는 계기일 뿐이었죠.
   이런 노력에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 불려 나가 무언가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 이따금 생기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최대한 빨리 그 상황을 끝마치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어요. 고등학생 시절 학습평가 중에 외국 민요를 부르는 가창 시험이 있었는데, 가사를 잊어버렸던 다른 친구들과 달리 독일어로 된 민요를 전부 외워서 불렀는데도 내가 받은 점수는 비교적 높지가 않았어요. 너무 긴장해서 시선을 내리깔고 박자를 놓치며 불렀던 내 모습이 영 자신감이 없어 보였던 탓일 테죠.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런 비슷한 기억이 아주 많습니다. 전혀 떨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목소리를 떨거나 긴장한 나머지 횡설수설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기억들, 다시 떠올리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펄펄 차게 만드는 부끄러운 순간들이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자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거예요. 내향적인 성향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릴 일 없는 직업을 찾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마침내 작가의 세계에 발을 들였지만 소용없었어요. 작가라는 업이 경제 활동을 위한 직업으로서는 성사되지 않았던 데다가 출간작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크고 작은 문학 행사에 다녀야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요.
   두려움을 생각하면 그런 주문이 떠올라요.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무언가로 제 모습을 바꾸는 보가트라는 괴물이 등장하는데요. 보가트를 물리치는 방법으로 두려움의 대상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되바꾸는 리디큘러스라는 주문이 나오죠. 리디큘러스를 배우는 수업에서 호그와트 학생들은 스네이프 교수로 변신한 보가트를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장한 모습으로 바꿔버리기도 하고, 거대 거미의 여덟 다리에는 바퀴 달린 신발을 신겨 미끄러뜨리기도 합니다. 아마 내가 보가트를 만난다면 그 괴물은 컴컴한 객석에서 나를 쳐다보는 어른들의 눈빛으로, 커다란 콘서트홀의 한가운데로 변할지도 모르죠. 나를 몇만 명쯤 되는 관객들 앞에 세워놓고 뜻도 잘 모르는 독일어 노래를 외워 부르게 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면 나의 리디큘러스 주문은 두려움을 어떻게 바꾸어줄까요? 나를 쳐다보는 관객들의 머리에다 고양이가 두려워할 필요 없는 머리띠를 씌워줄까요? 이곳이 비록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닐지라도 두려움을 어느 정도 줄여주는 몇 가지 현실적인 수단을 시도해볼 순 있겠어요. 발표회 30분 전 청심환을 삼키거나, 해야 할 말들을 미리 대본으로 써보거나, 이까짓 일쯤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 주문 아닌 주문을 외우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맞서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치는 게 가장 좋을 테죠.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면 적어도 괴물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아야 해요. 사람들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을 수차례 경험하고서 두려움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는 생존법을 나름대로 터득한 게 바로 이런 요령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방편들이 내가 지닌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해주지는 않아요. 여전히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인지 떠올리면 무대 위에 섰을 때의 불안,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순간의 압박감이거든요. 다만, 이제 나는 성탄절 연극에 섰던 일곱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고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벌벌 떨던 고등학생도 아니기에 좀 더 성숙하게 두려움을 맞닥뜨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듯이 선택했던 작가의 삶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듯이, 물리칠 수 없다면 그것과 타협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도요.
   또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괴물로부터의 생존법이 바꾸는 것은 무대도, 관객도, 두려움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현실에서 리디큘러스 같은 주문이 있다면, 그 주문의 비밀은 마법에 걸리는 대상이 보가트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요.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묘약을 삼키는 것도, 대본을 외우는 것도, 최면을 거는 것도 모두 스스로 거는 마법이겠죠.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리디큘러스를 외치려면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내게는 두려움을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적지 않게 찾아올 테지만, 주문을 어느 방향으로 외쳐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다면 아마 잘 해낼 수 있겠죠. 리디큘러스! 하고 외치면 변하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 보는 내 모습이라는 것을요.

주문의 비밀

조온윤

2023
산문, 9문단에 2,458자. 거꾸로 쥐는 지팡이, 거꾸로 거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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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온윤

서울에서 시를 쓰며 지내고 있다. 문학동인 공통점에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 onewn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