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물 / 월동지

이기현

   유실물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누구든지 원래는
   세상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며
   
   노면에 주저앉아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돌려주고 싶은 물건은
   잘 간직하고 있었는데
   
   초인종이 울리다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들 날 미워하게 될 텐데
   
   입술에서 피가 나면
   입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곳이
   대신 아파해주었다

   
   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밖으로 분주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물건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언젠간 다시 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지금이라도 아파하기 시작하면
   다들 아프지 않을 텐데
   
   문밖에 당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떠넘긴 슬픔이
   내 안에서 체류 중이었다
   
   내가 미움받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었다

유실물

이기현
2023
시, 32행에 323자. 화재경보기, 문밖으로는 분주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

   월동지



   그 사람과 오랫동안 걸었다
   내 눈동자에 찍히는 발자국이 무력했다
   
   밥을 주고 쓰다듬어주어도
   길고양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시를 쓰냐고 묻는 사람에게
   요새는 꿈에서만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어느 한 시절이 월동지가 되기도 했다
   숨소리가 십자가를 긋는 곳
   
   추운 잠에서 깨어나면
   무언가 썼다는 온기만 남았다
   
   길고양이도 애절하게
   누군가를 찾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 오래 전에 떠났는데
   꿈에서 자주 만나게 되어서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되었다
   
   함께 걸으면 다리는 아프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시절로 돌아가 시를 썼다

월동지

이기현
2023
시, 21행에 246자. 길고양이 울음소리, 아무리 쓰다듬어도 멈추지 않는.

   시작 노트



   삶은 박살 난 꿈의 파편 중 어느 하나의 끝자락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그때마다 시간을 초과해 나타나는 손길이 있었다. 그 질감이 우악스러웠는지 부드러웠는지 이제는 손이 닿았다는 감촉만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손길이 나를 외면한 적은 없었다.
   
   늦더위 시월의 기분은 어떠했지. 외투를 팔에 걸치고 걸었던 거리에서 풍기는 가을 냄새. 시들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자신이 없다. 일순간 점등되는 가로등으로 빼곡한 거리에서 언제나 들키는 감정들. 누가 지금 웃었거나, 기침을 했거나, 달아나기 시작했거나 하는 순간들. 술에 취한 친구들끼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편의점에 들어가는 그런
   
   사소해서 소중한 순간들. 희망도 그때는 버러지처럼 기어 오지 않았지. 단지, 나에 의해 슬프게 왜곡된 순간들. 자신이 없다. 나를 벗어난 공포마저 내가 유별나다 생각을 하고 그런 식으로 나도 일상에 편입되고 싶어 하고, 많은 이유로
   
   내가 내 삶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시는 시작되었다. 현실에서 깨어났을 때 꿈이었다. 그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박살 난 꿈속에서도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신에게 버림받으면 지옥에 가면 될 일이겠지만 자신에게 버림받으면 그곳이 지옥이 된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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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현

2019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문학동인 공통점에서 활동 중이다.

e-mail : tinannhuj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