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음악 / 소리풍경

나희덕

   바람의 음악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만든 아이올리안 하프를 
   콩코드 박물관에서 보았다
   
   풍명금이라고도 불리는 이 하프는 
   나무로 된 기다란 울림통에 
   세 개의 현과 튜너가 달려 있다
    
   바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이 하프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가만히 눈을 감으니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가 
   창가에 놓인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C-C-C, C-G-C, C-C#-C, C-E-C, D-A#-D, C-A#-C, D-A#-D, G minor
   
   바람 소리 사이로
   새소리 빗소리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거위 소리 
   워낭 소리 휘파람 소리 여우 소리 들려오고
   소로는 식구들을 창가로 불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연의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화음이 잘 맞았다
   
   바람이 다시 세 개의 현을 맴돌 때까지는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소로는 Deep Cut의 철로를 걸으며
   바람에 전깃줄 우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깊은 상처라는 뜻의 지명처럼
   삶의 벌판에서 한없이 울려 퍼지는 그 울음소리 역시
   아이올리안 하프의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나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
   현관에서 삽으로 눈 치우는 소리도 그에게는 음악이었다 
   
   악기의 현이든 전깃줄이든 
   펄럭이는 빨래든 스치는 나뭇잎이든
   나부끼는 깃발이든 종잇조각이든 
   
   바람에 우는 것은 모두가 생의 음악이었다

바람의 음악

나희덕
2023
시, 29행에 482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아이올리안 하프.

   소리풍경*



   네바다 산맥에서 녹음한 소리풍경은
   사람의 심전도 같고
   점묘로 그린 추상화 같기도 해
   
   숲의 주파수 그래프는 아주 풍성했지만
   벌목 작업이 끝난 1년 후에는  
   산메추라기, 갈색머리멧새, 흰정수리북미참새, 붉은관상모솔새,
   이런 새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져버렸지

   목초지에 살던 곤충들의 자욱한 울음소리도 사라지고
   개울물 소리와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만 남아 있을 뿐
   
   때로는 눈으로 숲을 보는 것보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를 녹음한 풍경이 숲에 대해 더 많은 걸 들려주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 풍경의 깊이 같은 것
   
   버니 크라우스는 세계의 소리를 낚는 어부,
   산호초 소리를 녹음하러 멀리 피지섬에 가기도 했어
   산호초 주변을 들락거리는 말미잘, 비늘돔, 열동가리돔, 흰돔가리돔, 놀래기, 복어, 
   넓적통돔, 나비고기, 노랑촉수 들로 빽빽한 소리의 숲을 만났지
   
   그러나 
하얗게 죽어가는 산호초 주변에서는 적막한 파도 소리만 들릴 뿐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화산이 분출하는 소리
   폭풍이 밀려오는 소리
   지반이 흔들리는 소리
   
   자연의 노래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더 이상 화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불협화음의 세계
   
   그가 녹음한 소리풍경은 말해주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잃어가는지, 잃어버릴 것인지
* 버니 크라우스, 『자연의 노래를 들어라』, 장호연 옮김, 에이도스, 2013.

소리풍경

나희덕
2023
시, 27행에 468자. 우리가 잃어버린, 잃어가는, 잃어버릴 소리들.

   시작 노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스스로를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인 히드라에 비유하면서 “저는 학교 선생, 가정교사, 측량사, 정원사, 농부, 페인트공, 목수, 석수, 일용직 노동자, 연필 제작자, 유리 사포 제작자, 작가 그리고 때로는 삼류 시인입니다”라고 썼다. 1837년 하버드 대학교가 졸업생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조사한 설문에 그가 보낸 답신이었다. 소로는 평생 안정된 직장 없이 여러 가지 일을 했기에 얼핏 한량이나 루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연과 삶의 원리에 대한 치열한 탐구자이자 통합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가 나열한 직업 중에 악기 제작자나 연주자는 없지만, 소로는 직접 플루트를 만들어 연주하기를 즐겼고, 아이올리안 하프를 제작해 창가에 두고 바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콩코드 박물관에서 소로가 만든 아이올리안 하프를 보고는 바람이 연주하는 음악이 궁금했다. 마침 소로의 초상이 그려진 음반이 눈에 띄어 들어보니, CD에는 바람이 내는 진동음과 함께 다양한 자연의 소리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소로가 누구보다도 청각적 인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가 잘 듣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내면에 자기만의 목소리와 음악을 지닌 시인이었다는 뜻이다. 소로는 스스로를 삼류 시인이라고 겸손하게 불렀지만, 세계의 소리와 진동을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유려하게 번역할 줄 아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철로가에 서서 바람에 전깃줄이 우는 소리를 하염없이 들었던 사람이었으니, 분명 고통에도 민감한 귀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소로가 만든 플루트도, 아이올리안 하프도, 주인을 잃은 채 콩코드 박물관 전시실에 우두커니 놓여 있다. 그 오래된 악기들 앞에서 나는 그가 들었던 바람의 음악을 들으려 애쓰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프로필_나희덕_대지_1.png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 산문집 『반 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 등,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문명의 바깥으로』 등을 출간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mail : rhd6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