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이면 / 당신이 읽었으면 한다

김소연

   되도록이면



    환풍구 소리를 음악 소리로 덮기 위해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리고 다이얼을 돌려 볼륨을 높인다 드디어 나를 괴롭혔던 소리가 내 귀에서 사라지고 나는 다이얼을 돌리기까지의 시간들에 대하여 시를 써볼 생각을 갖는다 소리를 소리가 덮고 냄새를 냄새가 덮고 벽지를 벽지가 덮고 기억을 기억이 덮고 새로운 경악이 경악을 덮고 사랑을 사랑이 덮고……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덮는 이론가에 대하여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평생 동안 구축해온 이론을 대형폐기물처럼 처리하기 위하여 또다른 논점의 글을 쓸 때에 그가 느꼈을 명료함에 대하여 희열에 대하여 

   시는 
   읽을 때보다는 쓸 때에 
   쓸 때보다는 무엇을 쓰려고 생각이란 걸 해볼 때에 
   그때가 가장 벅차다는 것을

   이론가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알았지만 벌레가 낳은 알처럼 빛의 속도로 번식하는 환상에 대해 이 정도인 줄은 처음 알기 시작한다 이론가에게는 이론과 더불었던 시간보다는 이론 이전의 삶과 이론 이후의 삶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훨씬 흥미진진한 것인데 그것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든가 이론이 무용한 영역이라서는 아니다 이론가에게는 가장 나중에 꺼내어볼 사례가 하나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례

   우리집 턴테이블이 자아내는 음악 소리를 가두기 위해 창문을 닫는다 소리가 갇히고 이웃집 망치 소리도 드디어 잘려나가고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굉음도 끊기게 될 때에 볼륨을 조금 더 높여 막스 리히터가 리메이크한 사계가 내 공간을 장악하게 만들어둘 때에 나는 비로소 

   시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와 새소리와 물방울 소리가 
   귓바퀴로 들어온다

   계절을 묘사하는 음악이 나를 가을 속으로 데려가겠다고 떼를 쓸 때에 나는 자발적으로 끌려가는 포로처럼 자연스럽게 부자연스러워진다 이제 준비는 다 된 것 같다 
시를 쓰기 위한 준비 시간과 시를 쓰는 시간 사이에 비로소 작은 돌이 하나 놓이고 그 돌을 디디거나 그 돌이 다시 사라지기를 기다리거나 나는 선택할 수 있어진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고

되도록이면

김소연
2023
시, 12행에 739자. 창을 닫자 잘려나간 소음들, 내 방에 가둬놓은 음악 소리.

   당신이 읽었으면 한다 



   광산이 있었어
   거기엔 광부가 있었겠지
   
   곡괭이가 있었을 것이고 곡괭이가 부러지도록 무언가를 캐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다
   잠시 멈춰 기침을 하면서
   
   당신은 어촌에서 자랐지
   배를 타본 적은 없지만 뱃사람의 자식이었지
   어딘가에서 비린내가 나면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했지
   
   당신은 광부가 집에 돌아가 작업복을 벗고 목욕을 하는 장면에 대해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
 어쩌면 상상은 해본 적이 있다
   
   경험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 노력이란 것을 하게 된다
   이별을 통보하기 위해서 이유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처럼 정교한 노력이 뒤따른다
   어떨 때는 그게 쉽지가 않아서 당신은 다시 생각해본다 광부가 아니라 어부에 대해서 썼어야 했나
   
   어부에 대해서 썼더라면 하고 싶은 말이 넘치고 넘쳐서
   오히려 다른 노력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거친 후 당신은
   어부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광산이 있었어
   오늘은 광부 하나가 그곳을 떠나는 날이라네
   
   광부라고 해서 광산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고
   광산에서 태어난 광부라고 해서 광산을 떠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고
   
   그는 바닷가로 간다 
파도가 있고 포말이 있고 유유히 날아와 곁에 안착하는 갈매기가 있는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당신에겐
   이제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광산이 있었어
   오늘은 결원이 생겼고 조금더 강도 높은 하루를 
   보내야 한다네

당신이 읽었으면 한다

김소연
2023
시, 25행에 496자. 기침하는 광부들, 곡괭이가 부러질 때까지.

   시작 노트



   「‘예술하기’가 전부인 사람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 내용은 적을 수 없다. 그 글은 제목만 있고 아직 작성되지 않은 글이기 때문이다. 나의 메모장에는 그렇게 숱한 글제목이 적혀 있다. 언제고 써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머릿속으로 대강의 내용을 구상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귀갓길에서거나 잠을 자야겠다고 베개에 머리를 대었을 때에 그런 유의 구상을 한다. 그래서 대강의 내용은 휘발이 되고 만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 순간, 스스륵 잠에 빠져드는 순간 다 잊고 만다. 다행히 제목만큼은 메모를 해두어야겠다며 어플을 켜고 메모장에 적는다. 급히 적어 철자가 제멋대로 찍혀 있을 때도 더러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대략 3천 걸음 정도의 거리인데, 생각이란 것에도 과자 부스러기처럼 물성이 있다면 그 길거리에 사는 개미들은 무척이나 포동포동할 것이다. 베개 주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뒤척이는 나의 어깨에 납작하게 눌린 ‘대강의 내용’들이 말라비틀어진 채로 켜켜이 쌓일 것만 같다.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한 권 구입했는데, 책등에 하늘색 띠를 두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철학. 160데239ㅇ.100 > 뒷표지에는 고양시한뫼도서관이라는 로고와 바코드가 적힌 스티커도 있다. 뒷표지의 안쪽엔 “이 도서는 한뫼도서관 자료입니다. 분실 및 훼손 시 동일자료로 변상하여야 하니 소중하게 다루어 주세요.”라는 안내문과 함께 고양시 정보문헌사업소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아직은 소중하게 다루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마지막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여러번 읽어도 좋았다. 내 생각이 적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론 이후의 읽기가 우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남는 일이라면 우리는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더 가까이 가게 될지도 모른다. 데리다가 언급하듯이, “
우리가 있을 때 진리는 거기 없다.” 우리가 겁주어서 쫓아내는 셈이다. 이것이 데리다에게는 아나콜투톤의 비논리의 일부분인데, 그것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리와 결코 동반자가 될 수 없다. 퐁타니에의 표현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친구 없이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물론 빵을 서로 나눌 동반자가 없다는 것은, 아무런 빵도 없기 때문에 나눌 빵이 없는 어떤 사람을 새로운 동반자 혹은 새로운 분신이나 귀신으로 발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데리다가 “유령 동반자”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는 이론 이후에 삶으로 귀환할 그 무엇에 아직 놀라지 않은 것이다.
   
   그대 궁궐 안의 유령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밀려나오네

   ―어니스트 존스, 「우리는 침묵한다」(1851)*
* 『이론 이후 삶』, 자크 데리다 외, 강우성 정소영 옮김,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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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이 있다. 

e-mail : catjuice@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