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노트
「‘예술하기’가 전부인 사람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 내용은 적을 수 없다. 그 글은 제목만 있고 아직 작성되지 않은 글이기 때문이다. 나의 메모장에는 그렇게 숱한 글제목이 적혀 있다. 언제고 써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머릿속으로 대강의 내용을 구상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귀갓길에서거나 잠을 자야겠다고 베개에 머리를 대었을 때에 그런 유의 구상을 한다. 그래서 대강의 내용은 휘발이 되고 만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 순간, 스스륵 잠에 빠져드는 순간 다 잊고 만다. 다행히 제목만큼은 메모를 해두어야겠다며 어플을 켜고 메모장에 적는다. 급히 적어 철자가 제멋대로 찍혀 있을 때도 더러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대략 3천 걸음 정도의 거리인데, 생각이란 것에도 과자 부스러기처럼 물성이 있다면 그 길거리에 사는 개미들은 무척이나 포동포동할 것이다. 베개 주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뒤척이는 나의 어깨에 납작하게 눌린 ‘대강의 내용’들이 말라비틀어진 채로 켜켜이 쌓일 것만 같다.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한 권 구입했는데, 책등에 하늘색 띠를 두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철학. 160데239ㅇ.100 > 뒷표지에는 고양시한뫼도서관이라는 로고와 바코드가 적힌 스티커도 있다. 뒷표지의 안쪽엔 “이 도서는 한뫼도서관 자료입니다. 분실 및 훼손 시 동일자료로 변상하여야 하니 소중하게 다루어 주세요.”라는 안내문과 함께 고양시 정보문헌사업소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아직은 소중하게 다루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마지막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여러번 읽어도 좋았다. 내 생각이 적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론 이후의 읽기가 우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남는 일이라면 우리는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더 가까이 가게 될지도 모른다. 데리다가 언급하듯이, “우리가 있을 때 진리는 거기 없다.” 우리가 겁주어서 쫓아내는 셈이다. 이것이 데리다에게는 아나콜투톤의 비논리의 일부분인데, 그것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리와 결코 동반자가 될 수 없다. 퐁타니에의 표현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친구 없이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물론 빵을 서로 나눌 동반자가 없다는 것은, 아무런 빵도 없기 때문에 나눌 빵이 없는 어떤 사람을 새로운 동반자 혹은 새로운 분신이나 귀신으로 발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데리다가 “유령 동반자”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는 이론 이후에 삶으로 귀환할 그 무엇에 아직 놀라지 않은 것이다.
그대 궁궐 안의 유령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밀려나오네
―어니스트 존스, 「우리는 침묵한다」(1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