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포꽃과 문어가 그려진 터널 지나가네 아치 너머에서 가래침처럼 끓어오르는 주황색 불빛 식어버린 페퍼로니 피자를 손에 들고 터널 지나오네 15년 전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찬 터널, 구경하면서 산들산들 춤을 추면 어쩐지 불경한 것 같네 지나간 시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만 같네 보행자 통로 난간 너머로 택시가 빠르게 터널을 빠져나가네 차들이 남기고 가는 소리가 이상하네 손을 아기처럼 모아 귀에 갖다 대면 들려오는 연보라색 소리. 사방에 퍼져 있네 이미 긴 터널을 빠져나간 사람의 흔적이 스키드마크처럼 귀에 맴도는 것만 같네 무언가 끌어 안고 바닥을 보며 걸어야 할 것 같아 조금 시무룩해져 보네 긴 터널을 빠져나간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네 터널을 빠져나오면 환한 빛이나 폭설 따위를 목도한다는 것이 이상하네 수원에는 그렇게 긴 터널이 없고… 터널이 얼마나 비싼 구조물인데! 긴 터널은 세금 낭비다. 라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터널이 조금은 짧아지는 것만 같네 터널 걸으면서 가로수에 물 주네 터널 걸으면서 소금사탕 천 개 먹네 터널 걸으면서
관찰 중지! 관찰 중지!
흔들리는 보랏빛 꽃과 새파란 문어를 한 곳에 그려둔 소년 멋져 소년 착해
2 지금부터 우리는 후추와 두통약을 동시에 먹기 사람 죽이고 인스타 켜기 정기모임에 나온다 하고 안 나오기 엄금합니다 단장 멋져 단장 동의해 단장 별로 착하진 않지만 그게 매력
우리 이상한 규칙 만들기 그만하지 않을래?
나 너무 힘들어
진짜로…
하나 둘 셋 하면 다같이 동시에 그만두는 거야
하나
둘
3 한 번에 삼백 마리씩 동물 소묘만 그리는 (상상의 동물 일부 포함) 천재 소녀가 나오는 만화책 (장물 아님) 이 만화를 그린 작가는 천재가 아닌데 천재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천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동안
누가 그랬던 것 같다 열심히 그려냈는데 뭔가 초라하면 비슷한 걸 백 개 정도 그려서 모아보라고 텅 빈 구멍도 한 곳에 모아두면 양감이 생기고 좋아 보인다고 지하상가 악세사리 매대처럼 천재가 아니어도 믿어주고만 싶은 귀여운 등장인물처럼 누가 그렇게 말했는가 아마 소년 소녀는 아닐 것이다
소년 멋져 소년 착해의 늪
김민식
2023
시, 36행에 823자. 귀를 갖다 대면 들리는 연보라색 소리.
글루타치온은 입천장에 붙여 천천히 녹여 드세요
수원에 정착한 뒤로 약사는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꿈속에 나온 친구에게 연락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고향을 떠나온 사람에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뭔데요? 왜 숨겨요? 빨리 말해주세요
사실은 일단 숨긴 다음에 생각하려고 했어요
약사에게 슬픈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작가인 나 자신의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며 남의 일처럼 적으면
이 비가 그치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빗소리가 그쳤다) 지난 밤 꿈속에 나온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기로
친구는 삼 년 만에 스케일링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핸드피스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약사는 바람이 덜 빠진 고무풀장을 무릎으로 꾹 눌렀다
친구의 입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약사는
화해나 사과 어쩌면 용서 같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쁜 일들을 세어보았다
글루타치온은 입천장에 붙여 천천히 녹여 드세요
김민식
2023
시, 37행에 550자. 비가 그치면, 생각하는 순간 그치는 빗소리.
시작 노트
나는 요즘 중단하는 시 쓰기에 빠져 있다. 지금까지 쓴 네 편의 중단하는 시들을 간단히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상력이 부족한 친구들은 연기 좀 그만두고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아, 죄송 / 정말 죄송합니다 / 영상이 자꾸 끊기네요 (「자선경매」) 죄송합니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놓여 있었네요 / 항아리를 열어보니까 이것저것 실재하는 좋은 것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 지금까지 기운 빠지는 말들은 다 취소하겠습니다 / 우리가 좋아하는 게 모두 여기 있네요 (「검은 십자가, 뉴 멕시코」) 관찰 중지! 관찰 중지! / 흔들리는 보랏빛 꽃과 새파란 문어를 한 곳에 그려둔 / 소년 멋져 소년 착해 (「소년 멋져 소년 착해의 늪」) 슬퍼하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게 / 우리 지금, 중단할까요? / 일시정지 일시정지 / 그것이 약사의 근황이었다 (「글루타치온은 입천장에 붙여 천천히 녹여드세요」)
중단하는 시 쓰기는 사전에 약속되었다고 믿어지는 전개나 기대감을 배반하는 방식의 시 쓰기이다. 나는 메타적 사고를 중단시켜 예상독자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좋다. 급변하는 시의 정황과 장면의 낙차가 좋다. 무언가를 완전히 멈추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화자가 좋다. 처음엔 내 시를 읽어주는 친구들을 실망시키기 위해 중단하는 시를 썼다. 그런데 친구들은 오히려 재밌다고 계속 이렇게 써보라고 했다. 지금은 중단/중지/단절 이후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시를 쓴다. 이번 < 활자낭독공간 > 프로젝트에서 나는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라는 두 가지 청각적 묘사를 토대로 중단하는 시를 썼다. 두 편의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중단 이후에도 남게 되는 것은 어쩌면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간 어떤 시간을 강렬하게 환기하는 감각이 후각이라면, 기억 속 공간을 상기시키는 감각은 청각인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소리만큼은 유령처럼 영원히 남아 내게 맴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렇다. 키오스크가 있는 식당에서 내 번호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코로나 때문에 세 번 밖에 못 나간 주민센터 실내수영장의 물소리를 아직 기억하는 것처럼. 무언가 멈춘 후에도 여전히 내 곁을 맴도는 소리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중단하는 시 쓰기를 계속 하고 싶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중단했을 때, 그것은 단지 중단했다는 믿음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언가를 멈춰 세웠다고 믿는 나를 두고 여전히 모든 것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일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녕 일시정지는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을 잠시나마 멈춰 세울 방법은 정말 단 한 가지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