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소리상자는 소리 전문가 요거트 조거트 씨의 업적이다. 그는 생전 다양한 공기의 파동을 상자에 수집해왔다. 기척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바람에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주의를 기울여 둘러보면 그는 어느 순간 꼭 사람들 틈에 섞여 있곤 했다. 그는 어딜 가나 수줍고 신중한 표정으로 상자에 소리를 담고 있었다. 입술을 모아 쭉 내밀고 고개는 왼쪽으로 살며시 기울이고 있던 그는 가끔 혼자 빙그레 웃곤 했다. 그는 벌레가 알을 깨는 소리나 속눈썹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상자를 지참했으므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들은 멋대로 뒤섞였을 것이다. 소리를 모은 그의 의도, 목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2) 이 상자는 멸망기 이전의 지구를 연구하는 것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요거트 조거트 씨는 지구 말기의 위대한 인물 50인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위인전을 쓰기 위해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수집하고 있다.
3) 손상당한 요거트 조거트 씨의 상자에 담긴 소리들이 내내 새어나오는 바람에 멈춘 지구는 오랫동안 누군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오인되었다. 발견자는 재빨리 뚜껑을 닫아 마지막 소리를 가두었는데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여 아직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4)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유전자상단으로 유전자칵테일링의 주역이라고 불리는 명신상회에서는 해당 상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명신상회는 유전자상인조합을 이끌고 있으며 유전자를 사고 팜으로써 우주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이 고루 섞일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 우주가족부 설립에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주해적 코스모아마조네스와 모종의 협약관계를 맺고 있다고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코스모아마조네스가 약탈한 블록의 유전자들을 고가에 팔아넘겨 중앙경찰들의 검문을 받은 적도 있다. 유전자가위를 환상적으로 사용한다는, 우주해적단 코스모아마조네스의 선의 미사토 레나가 상단주라는 소문이 있으나 경위를 확인할 수 없다.
5) 너무 조용할 때면 요거트 조거트 씨는 상자를 열어 사람들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6) 아, 지구가 다시 경련을 시작했군요. 잠깐 기다리면 금방 지나갑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리면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죠. 기계는 썩지 않으니까요. 사실 이천 년대의 지구 사람들은 의도적인 가벼운 감전을 즐겼다고 합니다. 경련으로 죽음을 은폐한 거죠. 지금의 지구가 그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