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거트 조거트 씨의 상자 / 스완송

조시현

   요거트 조거트 씨의 상자 1) 2) 3) 4) 5) 6)



   멸망에도 소리는 남아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들리는 게 아니라 떨리는 현상입니다. 파동이 청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이지요. 어떤 고막도 울리진 못하겠지만.
   
   떨려본 세포들이 떨림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소리는 몸에 새겨집니다. 

   오래 전 들었던 말들이 발끝부터 쌓여 있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다리를 떨었고요. 떨림에 떨림을 더하는 방식으로 자랐습니다.
   
   쉐이커를 흔드는 웨이터는

   가장 아름다운 맛을 찾고 있답니다.
   
   이를테면 밀크쉐이크.
   
   거품 많아 부드러운 맛.

   분자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떨고 있어요.
   
   세계의 밑동 시멘트와 콘크리트.
   
   떨림에 떨림을 더하는
   망치질 소리.
   
   도시는 다 잘라내고 남은 나머지를 모아둔 것 같고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그것이라 합니다. 
   
   어느 날에는 벌목장 앞에 오래 서 있었어요. 나무들이 같은 방향으로 쓰러지고 있었고 발밑이 울렸지요. 진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들을 귀가 하나도 없다면 세계는 떨리고 있는 그림일 뿐이고
   
   모두가 나무 쓰러지는 방향만 보고 있어서 죽은 새 하나 줍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날아오르는 소리를 밤새 듣고 싶어서 깃털을 뽑아 베개 아래 넣어두었어요.
   
   다음으로는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건물 사이에 부는 바람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거듭 눌리는 초인종 소리.
   
   밑동을 향해 
   차곡차곡 가라앉았습니다.
   
   죽으면 가장 오래까지 남아 있는 게 청력이라는데
   
   죽음은 옴짝달싹 못한 채 소화불량 방귀를 듣다 사라지는 것.

   여기서 왜 혼자 울고 있냐고
   
   누군가 내 등을 때리자

   온몸의 세포가 동시에 떨리며
      
   뒤섞인 소리들이 한 번에 새어나왔습니다.
   
   가라앉은 것까지 깊숙하게.
   
   요거트 조거트 씨는 그게 울음기관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담아갔습니다.
   
   야바위꾼은 
   기도하듯 양손을 쥐어
   흔들고

   주사위는 숫자를 내보인 채 오랫동안 떨리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멸망은 그런 거예요. 떨림에 떨림을 더하며
   
   자라나는 것.
      
   바닥부터 알맞게 섞이도록 걷고 뛰는 것.
   
   세계는 얼마나 거대하게 울려고
   떨림을 모으고 있을까요?

   듣는 귀가 사라지면 세계는 얼마나 길어질까요?
   
   할머니는 떨리는 무릎을 쥐며
   복이 달아난다 합니다.
      
   단단하게 굳히는 것은 시멘트의 일이지만
   
   모든 태어나는 것은 다리를 떨고
      
   망치질 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나무 베는 소리.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건물 사이에 바람 부는 소리. 갇히지 않고
   떨림에 떨림을 더하며
   
   사람들이 매일 걷고 뜁니다.

   끝에 걸맞는
   가장 적절한 음향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림이 되지 않으려고
   힘껏 흔들리는.

   약간의 복이 달아난
   미래가요.
1) 이 소리상자는 소리 전문가 요거트 조거트 씨의 업적이다. 그는 생전 다양한 공기의 파동을 상자에 수집해왔다. 기척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바람에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주의를 기울여 둘러보면 그는 어느 순간 꼭 사람들 틈에 섞여 있곤 했다. 그는 어딜 가나 수줍고 신중한 표정으로 상자에 소리를 담고 있었다. 입술을 모아 쭉 내밀고 고개는 왼쪽으로 살며시 기울이고 있던 그는 가끔 혼자 빙그레 웃곤 했다. 그는 벌레가 알을 깨는 소리나 속눈썹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딜 가나 상자를 지참했으므로 그의 움직임에 따라 소리들은 멋대로 뒤섞였을 것이다. 소리를 모은 그의 의도, 목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2) 이 상자는 멸망기 이전의 지구를 연구하는 것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요거트 조거트 씨는 지구 말기의 위대한 인물 50인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위인전을 쓰기 위해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수집하고 있다. 
3) 손상당한 요거트 조거트 씨의 상자에 담긴 소리들이 내내 새어나오는 바람에 멈춘 지구는 오랫동안 누군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오인되었다. 발견자는 재빨리 뚜껑을 닫아 마지막 소리를 가두었는데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여 아직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4)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유전자상단으로 유전자칵테일링의 주역이라고 불리는 명신상회에서는 해당 상자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명신상회는 유전자상인조합을 이끌고 있으며 유전자를 사고 팜으로써 우주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이 고루 섞일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 우주가족부 설립에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주해적 코스모아마조네스와 모종의 협약관계를 맺고 있다고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코스모아마조네스가 약탈한 블록의 유전자들을 고가에 팔아넘겨 중앙경찰들의 검문을 받은 적도 있다. 유전자가위를 환상적으로 사용한다는, 우주해적단 코스모아마조네스의 선의 미사토 레나가 상단주라는 소문이 있으나 경위를 확인할 수 없다.
5) 너무 조용할 때면 요거트 조거트 씨는 상자를 열어 사람들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6) 아, 지구가 다시 경련을 시작했군요. 잠깐 기다리면 금방 지나갑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리면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죠. 기계는 썩지 않으니까요. 사실 이천 년대의 지구 사람들은 의도적인 가벼운 감전을 즐겼다고 합니다. 경련으로 죽음을 은폐한 거죠. 지금의 지구가 그러는 것처럼.

요거트 조거트씨의 상자

조시현
2023
시, 57행에 954자. 어떤 고막도 울리지 못하는 멸망 후의 진동.

   스완송



   모든 빛이 균형을 가지고 
   정확히 같은 농도로 무너지면 흰빛
   
   흰마저 버리고 싶은
      
   유령들이 흰을 뚝뚝 흘리며 걸으면
   사람들은 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유령을 가두려고 집을 지었습니다

   마을에는 빈 집이 널려 있었고
   
   오래 전 그렇게 되었다고 누군가 알려주었습니다
   
   집을 많이 지었다고

   사람들이 이 도시를 회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고
   
   엘리노어, 로 시작하는 편지묶음은
   침대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부옇게 쌓인 먼지를 불다 재채기가 나와서
   영혼을 빼앗길 뻔했습니다
   
   곤충을 유인할 때에는 빈 병에 단 것이나 썩은 것을 넣어둔다고 합니다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실내는 밤마다
   균형을 가지고 같은 농도로 무너집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쓰레기통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절대라는 말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라지고 싶으면 투명도 뜯어내야 하는 마음 같은 건 모르지만
   처음부터 이 집의 커튼은 반만 매달려 있었고
   
   썩거나 단 것이 많아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유령의 곤란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입은 옷이 생전 가장 좋아하던 옷인지 많이 입은 옷인지 죽을 때 입은 것인지 그것이 선택인지 그러도록 정해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오랫동안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뱃속이 꿈틀거렸습니다
   
   여기선 자주 비가 내렸습니다
   너무 자주
   
   사라지고 싶어
   희미해지고 싶어
   깨끗해지고 싶어

   표백은 유령의 사건이지만
   겪어본 것 같습니다
   
   문을 활짝 열어놓았지만 
기척은 없고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쓰레기통에서 나올 물건
   
   한 남자가 양털을 깎고 있습니다
   
   사실은 깨끗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사라지고 싶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버린 유령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뚝뚝 흘려도 비만 내리는데
   
   쓰러진 사람들이 몸을 포개 흰빛을 뿜고 있습니다
   
   삶은 감자를 꼼꼼히 으깨
   저녁을 만듭니다
   
   가끔 숨소리가 들립니다
   
   가끔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너무 많은 색깔들
   너무 많은 무너진 것들
   
   실내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조명등을 켜고 겨드랑이를 열어
   흰 털을 뽑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스완송

조시현
2023
시, 54행에 784자.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 빗소리, 초인종 소리.

   시작 노트



   시멘트는 소리를 잘 흡수하지 않는다. 도시에는 떠도는 소리가 많다. 한 번도 마주쳐본 적 없는 윗집 사람은 새벽 두 시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화장실에서도 자주. 축구를 보는 건지 게임을 하는 건지 갑자기 크게 탄식을 흘리거나 박수를 막 치기도 한다.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가끔은 인기척이 반갑다. 그 시간에 그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이유도 있겠지. 그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름대로의 잠 못 드는 밤을 함께 넘기기도 했다. 

조시현_프로필_대지_1.png
조시현

2018년 《실천문학》 소설 신인상, 2019년 《현대시》 시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이들 타임』이 있다.

e-mail : melong4421@naver.com